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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건국과정과 왕의 업적 및 체제 정비

조선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 혹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을 기준으로 삼고, 세 파트로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1506년), 중기와 후기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삼는다.

약 500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풀이하기는 힘들어 이번에는 조선의 건국과 초기 왕의 업적, 그리고 조선 초기의 통치제도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다.

 

조선 초기의 건국 과정

고려말 이성계는 요동 출정의 명을 받고 지금의 북한 신의주 앞 압록강 지역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고려말의 수도)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이 출현하면서 이성계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는데 그 세력이 바로 조선의 중추세력인 신진사대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반이라 보면 될 것 같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고려말에 세력을 쥐고 있던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기반도 다지게 된다.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1392년 조선이란 이름의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게 되고 수도를 개경에서 나라의 중앙에 위치, 교통 편리, 외적 방어에 유리하다는 풍수사상에 의해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긴다.

이러므로서 완전한 조선 건국이 완성되게 된다.

 

국가 기틀을 마련하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초대왕인 이성계는 태조의 지위를 갖추게 되고 이성계의 3남인 태종에 이르러서 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게 된다. 태종인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개국 공신을 몰아내고 왕권 중심의 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외척 세력을 숙청하고 사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고 군대 강화 목적인 군역 부과에 활용하기 위해 호패법(지금의 주민등록증)을 실시한다.

세종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4대 왕이다. 조선의 황금기와 같은 시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유교적 이상 정치를 추구했으며 학자들의 연구기관인 집현전, 유능한 인재를 등용(황희, 맹사성 등), 훈민정음 창제로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고, 군사적으로는 4군 6진을 개척해서 지금의 한반도의 형태를 갖춘 왕이라 볼 수 있다.

성종은 조선의 9대 왕으로 나라의 기틀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만든 왕이라고 볼수 있다. 유교적 통치 질서를 완성했고 조선 통치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을 완성, 조선 초기 정권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시킨 왕이다.

 

체제 정비

조선의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중앙 정치 제도를 보면 최고 통치기구로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합의로 중요 정책 결정되는 의정부와 그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두었다.

또한 왕과 관리를 견제하기 위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두었고 왕의 비서기관이 승정원과 국왕 직속 사법기구로써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다.

지방은 8도로 나누었고 모든 도에 관찰사를 파견, 그 도아래 부, 목, 군, 현을 두어 모든 군과 현에 수령(우리가 알고 있는 사또)으로 다스리게 했다.

군사 제도로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관리하였고 국경 지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불이나 연기를 피워 전달하는 봉수제도도 있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조선이 유교 중심의 사회였기에 유교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과 TV에서 흔히 접했던 성균관이 최고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인재 등용에 있어서 과거제를 실시해서 전국의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였다.

과거제로 선발된 인재는 문과, 무과, 잡과(기술직)등을 통해 관직에 진출할수 있었다.

 

이러서 조선의 초기 건국부터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는 것을 보았다. 한 나라의 기본적은 역사 정도는 알고 있음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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